시론
연구중심병원 육성사업단/
마취통증의학과 김성훈 부교수
의공학연구소 10주년을 마주하며
올해로 의공학연구소가 1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제가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하며 의사로서 소양과 전문역량을 갖추게 되었다면, 연구자로서의 덕목과 자질은 의공학연구소에서 많은 부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0주년을 맞이한 의공학연구소가 저에게는 더욱 남다른 의미로 느껴집니다. 병원에 계시는 대부분 선생님들이 진료를 보시는 의사이자 임상적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자로서 나름대로 문제의식과 고충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공학을 하시는 연구자 분들은 공들여 개발한 기술이 얼마나 임상적인 니즈를 충족하는지 궁금할 것이고, 산업계에서는 애써 만들어낸 옥동자와 같은 제품이 현장에서 행여 외면 받지나 않을지 염려할 것입니다. 저 역시도 비슷한 문제로 혼자 고민하고 좌충우돌하던 와중에 10년 전 처음 의공학연구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연구소 안팎으로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해결책을 찾아가고 나름의 비전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 의공학연구소에서 겪었던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가 생각하는 의공학연구의 특수성과 의공학연구소에 고마웠던 부분 그리고 바라는 발전 방향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의공학연구의 매력은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면서 실제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를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무언가를 만들고 사람들에 널리 쓰이게 하는 일은 원초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공학(engineering)의 의미가 문제를 발견하고 기술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합니다. 의공학은 의료의 개념에 공학적인 원리가 적용된 융합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난생 처음 공학에 매료된 계기가 되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어린시절 아버지는 현대중공업에서 배 만드는 엔지니어였습니다. 평소 아버지는 '엔지니어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라는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현장과 사무실을 오가며 지냈기 때문에 늘 손에는 기름때가 끼어 있었습니다. 집안 한 켠에는 각종 서보모터며 글로우엔진 같은 장비들이 가득 찬 공작실도 있었습니다. 좁고 허름한 공간이었지만 마치 과학자가 연구하는 실험실 같은 느낌도 들고 해서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작업실 구경시켜 주면서 어린 마음에 으쓱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저의 취미도 집에 있는 가전 제품들을 뜯어보고 고치는 게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어린 아이의 실력이라 봐야 빤하기 때문에 대부분 경우는 멀쩡한 물건을 망가뜨리기 일쑤였는데 늘 아버지는 묵묵히 다시 고쳐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심지어 8088 XT 컴퓨터의 흑백 모니터를 분해해본 적이 있었는데, CRT 브라운관은 큰 고압이 발생하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가슴이 철렁했던 적도 있습니다. 저의 이러한 모험심의 배경에는 내가 사고를 쳐도 아빠가 언제든 수습해 주실 거라는 든든한 믿음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돌이켜보면 병원에 근무하면서 연구를 막 시작하는 입장에서 의공학연구소가 그러한 역할을 해준 것 같습니다. 내가 비록 연구역량이나 공학적인 지식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연구를 계획하고 추진하는 근간에는 언제나 의공학연구소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의공학연구소 차원에서 의공학 연구를 처음 시작하는 연구자들의 국책과제 수주를 돕기 위해 기획 단계부터 계획서 작성에 이르기까지 그간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고 조직적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서 젊은 연구자분께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초기에는 의공학연구소의 도움을 받기만 하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일정 부분 경험과 성과 측면에서 기여할 수 있게 되어 책임감을 느끼고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러 임상연구자 선생님들께서는 공감하실 텐데 내가 궁금한 부분을 언제든 찾아가서 물어볼 수 있고 상의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이 내 곁에 있다는 건 정말 큰 힘이 됩니다. 우리 의공학연구소는 중개의료기기, 생체재료, 재생의학, 의광학, 로보틱스를 비롯하여 인공지능에 기반한 의료영상과 의료정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적인 영역을 커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료와 공학이 만나는 대부분의 의공학적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해결 역량을 연구소 내부에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듯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연구진들이 어우러져 협력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임상적 미충족 수요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해당기술의 최신지견(state-of-the-art)은 무엇이며 하이프 주기(hype cycle)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연구를 잘 수행하려면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이해하고 뒤쳐지지 않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당대의 메가 트렌드를 잘 따라가면서도 한편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지키며 본질적인 부분을 추구하는 자세도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 병원의 연구중심병원 육성과제는 의공학적 연구를 핵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전국의 20여개 타 연구중심병원과 차별성이 있는 대단히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또한 최근에는 원내 여러 교수님들께서 범부처 의료기기개발과제 등 다양한 의료기기개발 실용화과제를 수행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우리 병원이 외과계열 뿐 아니라 내시경이나 인터벤션 부문의 진료실적이 탁월하고 풍부한 진료경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병원의 강점과 만나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융합연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임상의사 입장에서도 엔지니어의 언어와 문법을 잘 이해하고 또한 나의 당면한 문제를 엔지니어의 언어와 문법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학자와 공학자가 서로의 역할을 이해하고 각자의 세계를 인정하는 데서 의공학연구는 비로소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공학 연구에서 임상의사들의 어려움 중 하나는 의공학 연구수행에 대한 전문적인 트레이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의료기관에서 수행되는 임상연구와 임상시험은 규모와 질적인 면에서 이미 세계적인 수준입니다. 특히 서울아산병원은 국내에서 가장 풍부한 임상 경험과 임상 자원, 임상시험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임상환경에서 환자들을 모으고 임상연구를 설계하고 수행하는 것은 임상의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입니다. 그렇지만 융합학문인 의공학 연구를 수행하는 데는 임상연구 수행과는 다른 측면의 역량이 요구됩니다. 연구조직은 진료 부문과는 조직의 논리가 차이가 있고 연구팀을 문제없이 잘 꾸려가기 위해서는 경영인의 마인드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주제로 전문인력을 채용해서 교육하고 장비를 구매하여 운용하며 장기적으로 연구실을 세팅하고 조직을 경영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일 수 있습니다. 대개 풀타임 연구자들이 학위기간 동안 연구실 생활을 하면서 습득하는 노하우나 팁 들을 임상의사들은 의외로 놓치거나 잘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연구실내에서 다양한 출신의 연구원들 사이에 여러가지 갈등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팀원들의 다이나믹을 면밀히 관찰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초창기에 저도 의공학연구소를 드나들며 경험이 풍부한 여러 선생님들의 직 간접적인 도움으로 연구실 운영의 묘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연구원들 한 명 한 명을 개별 교수가 일일이 파악하고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는데, 의공학연구소에서 제공하는 학술대회나 교육 프로그램 뿐 아니라 컬처토크, 체육대회, 송년회 등 다양한 활동들에 참여하면서 연구원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화합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국내외 다양한 연자분들이 초청되는 의공학연구소 특강 시리즈도 전문분야의 최신 지견 업데이트 뿐 아니라 연구원들의 학구열을 채워주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향후에도 연구소내 구성원들이 국내 최고 기관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을 고취하고 소속감을 가질 수 있도록 AMIST 대학원 프로그램과 연계한 학술대회 및 홈커밍데이 등 다양한 행사들이 확대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근 국가연구과제의 큰 방향성은 최종 산출물이 실제 현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실용화 성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현재 우리 병원에도 15개 이상의 교수 창업 스타트업이 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의료기기 개발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해마다 많은 기업들이 의료기기 개발의 초기 아이디어 발굴부터 임상검증 및 고도화 과정에서 공동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 병원을 찾고 있습니다. 연구산출물의 사업화 지원 관련하여 원내에서는 R&D사업단에서 주로 관장하고 있으며 우리 연구중심병원 육성사무국에서도 원내창업기업과 연구중심병원 참여기업들의 신의료기술 및 보험수가등재 전략 자문에 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의공학연구소 산하에 기업연계 의료기기 개발센터(HOPE)를 선도적으로 개설하였고 현재는 국산의료기기 교육훈련 지원센터로 이어져 대단히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R&D실용화에 대한 대내외 수요가 점차 많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의공학연구소에서 실질적인 산학협력을 촉진하고 R&D산출물의 실용화 관련한 역량들을 더욱 내실 있게 다져갔으면 좋겠습니다.
개소 10년차를 맞이한 우리 의공학연구소의 위상이나 존재감은 매우 큽니다. 병원 내외의 많은 연구자와 기업들이 우리 의공학연구소와 더불어 성장해 왔기에 10주년은 매우 뜻깊은 일이고, 향후 10년, 20년이 더욱 기대 됩니다. 의공학연구소는 우리 연구자들에게 사랑받고 신뢰받는 연구기관입니다. 저와 같이 의공학연구소의 고객 입장에서 시작하여 결국엔 팬을 자처하는 사람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의공학연구소가 우리나라 산학연병 협력의 중심에 우뚝 서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너른 울타리로 연구자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계속 해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