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
의공학연구소장 최재순
거의 회복된 일상으로 맞이하는 첫 봄, 거리에는 정말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세상 마지막 봄꽃을 놓치지 않으리라 여기나 싶게. 하지만, 대략 봄이 내년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확률은 매우 낮지 않나 싶은데요, 인생에서 중요한 기회나 고비들 앞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반갑고 매우 기대되고 조심스러워서 이번에 꼭 뭔가를 이루어야 할 것 같은 긴장감. 그러나, 사실 지나놓고 다시 보면 기회는 다시 또 오고, 어쩌면 더욱 큰 기회가 오기도 하고, 같은 모양으로 다시 허여되지는 않더래도 못지 않은 기회는 또 오고, 그래서 웬만하면 조바심 낼 것도, 염려할 것도, 혹여 다시 없을런지 겁내어할 것도 없다 싶지요.
지난 가을에 약속드린 바와 같이 제 창업 도전기의 두번째 이야기를 드릴텐데, 자질구레한 과정들 보다는 겪으며 느낀 짧은 생각들을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2021년 10월 말에 투자금의 납입을 모두 받음으로 소위 시리즈 A의 클로징이 되었는데요, 2021년 2월 본격적인 시리즈 A 투자유치를 위한 투자사 만남의 시작부터 약 9개월 간 앞에서 말씀 드린 기회와 실망과 새로운 기회와 또 실망과 다시 또 반전과, 이런 연속이었던 듯 싶습니다. 스무 군데 정도 만난 듯 싶고, 이모저모 많은 얘기를 나누고 기대 가득한 저녁을 보내게 하는 미팅도 있었고, 냉랭한 지적과 질문들 앞에서 처절하게 깨어진 날도 있었고, 깨어지다 못해 창업자들 간에도 서로 약간 신경이 곤두 서기도 해 보았고, 아, 정말 세상에 그많은 돈이 다 어디에 있고 우리 앞에는 정말 없는 걸까, ‘천사’를 정말 찾아가고 싶다 (그분들 주로 생활하시는 세상으로 넘어간다는 것 아니고, 여기 현세에 ‘엔젤’ 투자자 중에 정말 맘 열린 분 찾는 의미…) 이렇게 바닥을 기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대략 5월 말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4개월 지나고, 웬만한 투자자 다 만났고, 사업계획서 자료는 입에 대충 외도록 붙었고, 하지만 없는 답은 여전히 없고, 아무도 투자하겠다고 손들지 않는 그런 시점.
저로서는 매우 드라마같은 반전이었지만, 사실 되돌아보면 그냥 그 당시 그 회사 사정에 그냥 일상 있을 수 있는 조금 특별한 정도의 경우였던 듯 싶은데, 여하튼 6월에 갑작스런 반전, 아무 이유도 없고, 그냥 어느 한 회사가 문득 갑자기 나타났고 (사실 외전을 써서 자세히 들여다 보기로 한다면 이모저모 얽힌 인연과 스토리는 있는데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그 대표가 IR 발표 다음 날 그냥 단박에 결정을, 그것도 제가 포기하는 심정으로 그냥 물어보시니 답은 드린다는 심정으로 얘기한 회사 가치를 그대로 인정해 주는 엄청난 조건으로 결정을 훅 해 주어 버렸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또 난데없이 이전 4개월 동안 듣도 보도 못했던 큰 회사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고, 여기도 그냥 따라와 주었고, 오히려 터진 봇물을 막는 느낌으로 욕심 내지 않고 적절한 투자액과 투자사를 결정하느라 한편 행복해 보이지만 제 속으로는 사뭇 고생스런 고민을 하는 시간을 약간 보내고서, 드디어 투자계약서를 만나게 됩니다.
그 가을에 저는 아주 우울한 몇 주간을 보내었는데 소위 투자계약서라는 것을 생전 처음 읽어보고 도장을 찍을 때까지의 시간이었습니다. 여러가지로 ‘이해관계인’로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 일단 우울했고, 우울하다기보다 살짝 두려웠고, 그 모든 것을 저 혼자 맡는다는 것은 분명 우울했고, 자본의 힘과 무서운 이면을 절감하는 것이 또한 우울했습니다. 성공을 하면야 그들도 저도 행복한 것이겠지만,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책임은 모두 저에게 오고, 그 모든 것이 단지 그 돈이 제게 없어서 그걸 도와준다는 이유로 제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약속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히 상식적인 얘기임에도 참 우울했습니다. 언제까지 개발한 기기의 식약처 인허가를 완료하지 못하면 주식의 가치를 깎는다, 이러저러 다양하고 복잡한 이유 중 어느 하나라도 걸리면 어느 날 갑자기 대출 갚듯 상환을 그것도 거액의 이자와 함께 요구할 수 있다, 등등… 처음이어서 그런 거라고 스타트업 경험의 선배인 제 후배가 곧 익숙해질 거라고 조언해 주던 그 모든 조항들 하나하나가 그때 제게는 참 무겁고 우울하기 그지없게 만드는 것들이었습니다. 당장 지금 수갑 차고 감옥에 끌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연구비를 선정 받으면 그날 하루 또는 그 한 주일 딱 기분 좋고, 그 담부터 주욱 또 새로운 고생의 날들인데, 그냥 필요해서이기도 하고, 또, 사실 그 ‘하루’나 ‘한 주’는 매우 짜릿한 기쁨의 경험인 것도 사실이고 해서, 그냥 계속 다시 또, 사실 많은 경우는 점점 더 큰, 연구비에 도전하게 되는 것처럼, 투자도 꼭 같이 그 ‘하룻밤’을 얘기해 주변에서 얘기해 주시던데, 사실 저는 통장에 투자금 들어온 것을 확인하던 날에도 여전히 그 우울과 불안이 더 커서 그닥 ‘짜릿’한 기쁨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뭐 그래도 기분 나쁜 일은 당연히 아니었지요, ‘not bad~’
사실 본격적인 개발의 고난의 새로운 여정을 경험하게 된 그 이듬해 (2022년)를 가기 전에도 2021년, 투자자들과 새로운 ‘질의응답’의 여러 시간을 가지던 중에도 의료기기 개발에 대해 뚜렷한 배움 하나가 있었는데, 이 기기가 도대체 어떻게 얼마나 왜 환자들에게 (그 다음에 병원에게, 그 다음에 의사에게) 효과와 혜택이 있는가가 정말 중요하고 또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얘기는 지난 2021년 가을 저희 뉴스레터 인사에서 드린 적 있어서 오늘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개발 말고 창업의 과정에서의 배움으로라고 돌이켜보면, 이 첫 투자유치의 기간 동안의 배움 또는 재확인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생은 참 오묘하게 야속한 듯 싶기도, 그러나, 절대 배신 안하는 듯 싶기도, 참 그야말로 오묘한 과정이라는 것이고, 어떻든 갖은 매뉴얼이나 참고서나 강의가 있을지언정, 이 창업과 투자라는 것도 여전히 인생의, 그것도 매우 짧은 시간 농축된, 특징이 고스란한 과정이어서, 끈기있게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 우울할 것도, 두려울 것도, 조바심낼 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고, 새로운 지식도 없고, 별 2개가 아까운 얘기가 되어버려서… 대단히 송구한 맘인데요… 혹시 이 과정을 겪게 되실 분들은 그 터널의 끝에서 비슷한 생각하시게 될 것이라 여깁니다…
전호에서 약속드린 얘기 중에 해외 경쟁사를 이기기 위한 기술 개발 얘기는 다음 호로 미루기로 하고, 그때 말씀드렸던 ‘확증임상시험’은 지금 사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깜짝 변수를 만나서 그냥 후루룩 뛰어 넘고서, 허가에 해당하는 뭔가 통과를 하나 이미 해버렸는데요 (그래서 위에 말씀드렸던 refixing 조항은 그냥 어느 날 갑자기 후룩 해소되어 버렸답니다), 제가 다시 또 염치없이 이 재미없는 얘기를 당돌하게 이어갈 맘이 난다면, 가을에 다시 또 이어서 전해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예고편만 당당하네요… 끝에 살짝 거룩한 모드로 다시 맺어보면, 우리나라 의료기기 개발과 실용화의 새로운 또 한 줄기 역사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일념만은 뚜렷한 구멍가게 사장의 서툰 도전기로 여겨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년에도 봄은 대체로 높은 확률로 분명 다시 돌아올 것이지만 어떻든 오랜만에 만개한 봄을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꼭 붙잡아 만끽하시고, 힘찬 여름 보내시고, 가을에 또 뵙겠습니다. 하시는 모든 일에 큰 기쁨과 성취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